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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일 유리조형 교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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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성과 다원성:

현대유리예술의 동아시아성과 그 표정들

장동광(미술평론가, 유리섬미술관 객원큐레이터)

1.
이번 유리섬 맥아트미술관에서 열리는 <한 일유리조형교류전>은 한국과 일본의 중견, 신진작가를 망라한
현대유리예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특별한 기획이다. 한국에서는 유리예술의 1세대를 형성해 온 김성연,
김기라를 비롯하여 대부분 외국에서 유리를 공부하고 돌아온 이들로 장경남, 김준용, 정정훈, 조현성, 송민정,
이학주가 참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현대 유리공예의 역사가 일찍 시작된 일본에서는 이에즈미 토시오
(家住 利男, Iezumi Toshio, 1954~), 이소가이 아키히로(磯谷 晴弘, Isogai Akihiro, 1955~), 오무라 순지
(大村 俊二, Omura Shunji, 1962~), 사사키 마사히로(佐々木 雅浩, Sasaki Masahiro, 1969~)가 초대되어
모두 12명의 작가의 작품들이 소개되게 된다. 특히 일본의 네 작가는 일본 유리예술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제적 지명도를 지니고 있을 뿐더러 대학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교육자들
이기도 하다. 유리공방의 설립과 운영, 대학에서의 유리공예 교육, 미술관에서의 전시와 작품소장 등이 활발
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에 비해 비록 늦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도 새로운 부흥기를 꿈꾸는 장르가 바로
유리매체를 다루는 영역이다. 국민대, 홍익대, 남서울대, 청주대 등에서 유리전공을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
하고 있는 것이 그 실례이다. 대학에서의 인재양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작품을 전시하고 대중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중개기관 즉, 미술관과 화랑의 존재와 역할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부도에 3년 전에 개관한
유리섬(Glass Island)의 유리공방과 미술관은 한국 유리공예의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이제, 이
유리섬 맥아트미술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유리작가들과 한국의 중견, 신예작가들의 작품을 교류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상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야흐로 유리예술의 동아시아성을 한 자리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는 문호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필자는 1991년, 삿포로 홋카이도근대미술관(Hokkaido Museum of Modern Art)에서 <현대유리예술국제 공모전(World Glass Now 91)>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바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국제적 명성을 지닌 유리
작가들의 작품들이 도쿄도 아닌 삿포로에서 전시되고 있었고, 조명을 설치한 좌대의 설계 등 디스플레이의
세심함에서 유리가 얼마나 환영적 매체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내가 본 감상은 유리
라는 매체가 단지 공예성을 지닌 투명한 질료가 아니라 기술을 넘어선 개념적, 조형적 매체로써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이후 한국 유리예술의 1세대를 형성하게 된 김기라의 첫
개인전을 기획하여 내가 일하고 있는 갤러리에서 선보인 바 있었다. 그것이 필자와 유리예술과의 강렬한 첫 만남이었다.
사실 유리라는 매체만큼 우리 세상에 환영의 세계를 선사하는 질료를 달리 찾기는 어렵다.
그것은 투명한 질료성에서 비롯된다. 물질의 실재성과 빛이라는 비물질성이 상호 교직되면서 안과 밖의
경계는 무화되고, 중첩된 이미지들의 서사적(敍事的) 표현 또한 가능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자연의 빛이나
인공적 조명에 의해 투사되는 스펙트럼 효과나 미묘한 빛깔들은 인간의 색채감각의 지평 너머에서 불어오는
초월적 바람과 같다. 유리 매체의 장점은 이처럼 투명한 질료성으로 인해 몸체 안의 이야기(혹은 안에 남긴
물질)를 진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극단적인 단점은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도자기와 같이 깨지기
쉽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유리공예나 유리예술이 지닌“극단적 비극미(Tragic Beauty of Extreme)”
라고 말하고 싶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사랑이 그러하듯이 사랑이 애절하게 각인되는 것은 비극적
결말이나 비련(悲戀)의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유리는 빛(혹은 조명)의 존재성이 사라지면 오로지 자신의
몸체로서 조각성만을 드러내게 되고, 깨질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조심스러운 애호심이 요구된다. 마치
여린 꽃이나 하얀 눈처럼 다루어야 하고, 때론 너무나 소중하기에 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소녀의 몸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극단적 비극미가 유리라는 매체 속에서는 숙명적으로 내재해 있다. 그러나
유리는 빛(혹은 조명)을 만나게 되면, 그의 원초적 존재성이나 생명력은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의 신전이
태양의 힘을 얻듯이 재생(再生)하게 된다. 비로소 유리는 인간과 신의 세계를 매개하듯이 재활하여 인간의
시각적 경험을 초월적 세계로 나아가게 인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에게 유리 매체란 우리 인간세계에
비극적 감성을 전파하는 특별한 표상(表象)이자, 빛이나 조명과 같은 타자의 개입을 통해 새로운 환영체로
부활하는 불완전한 몸체의 유일한 이름이다.

3.
이번 <한일유리조형교류전>의 전시제목에서‘유리조형’이라는 용어를 부각시킨 것은 이번 전시가 유리
매체를 실용성이나 기능적 도구성의 산물로 구속시키지 않고 조형성과 심미성을 가진 예술적 장르로 인식
하고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재고해야 할 점은 어떤 예술적 표현물이 공예나 예술이냐를
규정하고자 할 때, 제작자의 위상이나 대상물의 잠재성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공예가가
만들었다고 그가 제작한 모든 것이 공예품일 수 없으며, 대상물이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다고 그릇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원작의 탈원본성(脫原本性) 내지는 변용성(變容性)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원래 사물이 지닌 본래의 기능이나 목적이 다른 이유에서 이탈하거나 변용될 가능성을 상정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카페트가 중동지방 등에서는 벽에 걸려 회화적 장식화로 변용되기도 하고,
유럽 등에서는 도자기 접시가 벽면에 걸려 회화적 혹은 인테리어적 장식물로 전용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실례이다. 오늘날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역사적 유물들 중 도자기, 가구, 의상 등이 실용성을 떠나 심미적
감상성을 지닌 예술적 오브제로 전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미학적 가치변인(價値變因)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대상으로서 공예품이나 조각, 회화가 실용성을 갖느냐, 심미성을 갖느냐
하는 문제는 그것을 소유하거나 관리(향유)하는 주체에 의해 가치판단이 새롭게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백자 항아리를 단지 감상하는 도구로 배치하는 일이나 수묵화를 창호지로 대신했던 실제적 사례들이 바로
이러한 극명한 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예술 자체가‘물질적 대상’이라는 점을 강화시키는 일일 뿐 아니라,
실용성과 예술성의 경계를 긋는 일은 비평가나 화상의 역할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소유자의 가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다음에 기술할 작가
들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4.
이에즈미 토시오는 현재 쿠라시키예술과학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유리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여러
장의 판유리를 접합하여 유리 자체가 지닌 투명성, 차가움을 기반으로 하면서 형태적 변형을 시도하고 있다.
수평 혹은 수직적 선상으로 겹겹이 층을 이룬 구조로 작업한 뒤, 유기적인 형태를 만들어 입체적 변주성을
가진 조각으로 구현해 낸다. 그의 작품은 유리의 본질적 특성인 투명성에 의해 깊이감과 공간감이 환영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깊고 푸른빛을 지닌 조각적 형상 속에서 관조적 명상성을 만나게 된다.
이에즈미는 이 복합적 중층구조와 유기적 형태로의 변형을 통해 환영적 공간감과 리듬감을 구현하고 있는데,
마치 투명하고 깊은 물속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신비감은 그의 독자적 특성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주로
일본과 미국을 주 무대로 하여 현대건축과 접목하여 환경조형물을 제작하기도 하며, 미국 코닝유리박물관을
비롯하여 미국과 일본의 주요 미술관에 다수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소가이 아키히로는 유리의 투과성과 투명성이라는 본질적 특성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분수(Fountain)’라는 주제에 20년 넘게 천착하여 오고 있다. 호수, 늪지, 강, 바다 등이 물이라고 하는 자연
계의 원천적 요소가 배태한 산물로 인식하고 이를 조형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반원꼴이나 사각형
혹은 유기적인 유리 덩어리를 만든 후, 표면에 금박이나 색유리를 사용하여 회화적 표현을 시도한다. 이로써
물체의 안과 밖은 서로 중첩되거나 교직되면서 하나의 입체적 직물로 재탄생한다. 빛의 투사는 표면에 덧붙
여진 부조적 색채나 질감에 의해 적요(寂寥)하면서도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듯한 신비로운 시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소가이는 외부의 표면에 회화적 터치를 가미함으로써 유리의 투명한 내부가 하나의 심미적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분수 시리즈>는 자연의 원초적인 물의 신비함에 주목하여 투명성의
유리를 하나의 소(沼)로 만들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그 경계를 드러내는 시적(詩的)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다.
오무라 순지는 현재 동경 무사시노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유리작가로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그는
1985년 동경유리예술연구소(Tokyo Glass Art Institute)에서 처음 유리예술에 입문한 이후, 니이지마유리
예술센터(Niijima Glass Art Center) 창설멤버로도 활동했다. 니이지마에 4년 동안 어시스턴트로 일하면서
데일 치훌리를 비롯한 현대유리예술의 거장들을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오무라는 1994년
치바에 개인 유리공방을 연 이후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약을 펼쳐 왔다. 그의 유리예술의 세계는
매우 미시적인 세계에 주목하여 작은 단위들을 집적적(集積的)으로 만들어 마치 생물체의 구조를 보는 듯한
연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유리기법은 대롱불기(glassblowing)에 기초하지만, 이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래 금형작업 등을 통한 입체적 조형물을 제작하기도 한다. 오무라는 작품의 창작적 모티브를
자연에서 찾는다. 예를 들자면, 물의 거센 흐름을 표현한 접시형태의 기형(器形), 거친 돌에서 솟아나온 듯한
식물의 줄기를 재현한 것 같은 오브제 등은 그의 조형적 관심사가 생명 혹은 자연의 미묘한 질서나 기세(氣勢)를
유리라는 매체로 표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오무라는 대비적 관계성이나 집적적
구성을 통해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자연물들의 내밀한 질서나 숨결, 흐름 등을 유리의 투명한 매체를 통해
조형화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역시 오를리안스 현대미술관 등 일본의 주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사키 마사히로는 나고야에서 출생하여 토야마글라스아트연구소(Toyama Institute of Glass Art)에서 유리
예술을 공부했다. 현재는 아이치교육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유리작가로서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사키는 이번 전시의 일본작가 중 가장 젊은 작가로서 유리라는 매체가 아니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형태의
작품을 발표해 오고 있다. 오무라의 작품이 집적적이라면 사사키의 작품은 보다 구축적(構築的)이다. 내부가
비어 있는 구조로 일정한 단위소들이 서로 결합되면서 투각된 형태의 입체물이 구현된다. 매우 섬세하고
복잡한 작업공정을 거쳐야 하는 그의 유리작품은 불투명 혹은 투명한 빛깔의 단위들이 연결되어 마치 DNA
구조나 파충류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그는‘변태(變態; 일본말로 Tensei, 영어로는 Metamorphosis)’를
주제로 삼아 이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해 오고 있다. 그는 어떤 생명체가 남긴 변태적 흔적을 하나의
순환적 관계로 인식하고 우리 자연에 내재한 보이지 않는 질서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늠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미시적 세계를 오브제로 구축하려는 것이며,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조형적으로 드러내려
한다. 사사키는 앞서 서술한 유리예술이 가진 극단적 비극미의 한 전형으로서, 곧 부서질 것 같은 처연한
몸체의 구축물들은 우리 세상의 보이지 않은 혹은 사라졌지만 언젠가 있었던 과거의 현존성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김성연은 우리나라 유리공예의 1세대로서 두산
유리의 수석디자이너로 오랫동안 일했으며 현재는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유리작품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대비하듯 보여주며, 유리가 가진 투명성과 색채의 환상성을 직조하고 있다.
김기라는 미국에서 유리예술을 공부하고 돌아 온 1세대의 대표적 작가로서 현재는 국민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유리작품은 유리의 투명성과 물성적 표현을 가미하여 공간적 변주를 창출하는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이번 출품작은 새의 깃털을 소재로 하여 조형적 변주를 시도한 것으로, 내부적 응집성과 외부적 확산성을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깃털의 결합적 구조가 마치 꽃의 형태처럼 연상되는데, 인디언 블루적 색채가
안쪽과 바깥쪽에 배치되었을 때 느껴지는 시각적 착시현상, 그 변주적 질서가 시선을 자극한다.
장경남은 일본 구라시키예술과학대학에서 유리예술을 공부하고 현재는 같은 대학의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5년에는 토야마 현대유리대상전에서 대상을, 2009년도에는 아시히현대도예공모전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유망한 작가이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추상화하여 인간의 내면적 심사나 기원의 정(情)을 유리로
조형화하는데 주력해 오고 있다.
김준용은 미국 로체스터공과대학에서 유리예술을 유학하고 돌아와 현재는 청주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릇 혹은 자연물의 변형적 형태로서 투조(透彫)나 요철로 형성된 입체물의 색채적 변주성이
특징적이다. 마치 오래된 토기를 보는 듯한 그의 형태들은 유리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색채와 빛의 투과로
현현(顯顯)되는 투영적 그림자가 또 다른 작품의 결속체로 연합되고 있다.
정정훈은 남서울대와 국민대에서 유리조형을 공부했으며, 현대사회의 풍경이나 동심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독특한 이야기들을 다양한 색유리를 사용하여 풍자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발표해 오고 있다.
조현성은 남서울대와 국민대를 졸업하고 미국 서든일리노이대학교 카본데일 대학원에서 유리를 공부하고
돌아와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그는 투명한 유리 구조물에 일상적인 서사를 간결하게 담아내어
설치적 구성하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송민정은 미국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을 졸업하고 다시 영국 런던 왕립예술학교에서 예술학박사를
한 작가다. 그녀는 주로 판유리를 사용하여 실재성과 빛이나 겹쳐진 유리에 의해 조성되는 왜곡된 이미지를
병치하는 작품을 하고 있다. 주로 자연풍경이나 물에 비친 이미지가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변화성에 주목하고 있다.
끝으로 이학주는 남서울대를 졸업하고 로체스터공과대학에서 유리조형을 공부하고 돌아 왔다. 그는 주로
기하학적 형태에 어떤 미묘한 이미지를 조각하거나 유리의 절단면 혹은 색유리의 결합적 구조를 부각시킴
으로써 유리라는 매체가 가진 환상성을 가시화하고 있다.
일본작가들이 유리예술에 투신한 연륜과 작업량 속에서 보다 밀도있는 작품세계를 담보하고 있다면, 우리
나라의 신예작가들은 작업세계를 내밀하게 다져가야 할 수련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는 현대유리예술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이 지닌 동아시아성의 단면을 짚어보는 유효한 계기가 될
것이며, 또한 양국 간의 유리조형의 미래적 진로에 의미있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나는 이번 유리섬의 이
교류전을 통해 현대유리예술이 가진 관조적 음률과 개념적 다원성에 관한 사색을 만나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5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