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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속 이야기” – 유리 숲 속 이야기

전시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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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후원하는 유리섬미술관 ‘속속이야기“ 전시를 시작하였습니다. 안산과 대부도에 초.중.고 어린이들의 스케치를 유리공예 작가들의 디테일한 표현력으로 탄생한 40여점의 작품들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 아이들에 즐거운 상상력의 온기로 가득 담아 가시길 바랍니다~
원형적 이야기와 이야기들의 연쇄 그리고 상호텍스트성
속속 이야기 – 유리 숲 속 이야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가 이미 일어난 일 곧 사실을 기술하는 일이라면, 예술은 있을 법한 일이며 가능한 일에 대한 기술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예술의 존재방식을 진리에 결부시키면서, 예술적 진리를 과학적 진리와 구분했다. 그 자체 증명의 대상이면서 실제로 증명을 해보면 증명이 되는 진리가 과학적 진리라고 한다면, 애초에 증명의 대상이 아니거니와 억지로 증명을 해봐도 당연히 증명이 안 되는 진리가 예술적 진리다. 예술은 말하자면 역사 바깥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일이며, 진리 바깥에서 진리를 드러내는 일이다. 소위 바깥의 논리야말로 예술을 견인하는 원동력이다(모리스 블랑쇼). 무슨 말인가. 예술은 사실들의 역사가 아니라 입장들의 역사라는 말이다. 이런 입장들의 역사가 예술에 대한 정의를 분분하게 해준다. 이처럼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예술은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며, 말을 거는 기술 곧 이야기하는 기술일 수 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렇게 표현된 이야기를 매개로 상대방을 설득시키고 공감을 얻는 기술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 타이틀에도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대로 옮겨보자면 <속속 이야기 - 유리 숲 속 이야기>이다. 저마다의 속내를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세부적으론 각각 그림 속 이야기와 유리조형에 반영된 이야기가 상호작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부르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그렇게 이야기에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확장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이야기는 이야기에 대한 의미심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알다시피 문자 이전에 말이며, 기술 이전에 구술의 소산이다. 구술시대에 말로 하는 이야기는 역사를 기억으로 간직하고 전수하는 중요한 기술이었다. 당시 이야기 전수자는 말하자면 지금의 예술가의 전형이랄 수 있고, 그가 하는 이야기는 원형적 이야기 그대로라기보다는 원형적 이야기에 대한 주석과 해석과 인용이 덧붙여진 이야기일 수 있다. 원형적 이야기에 대한 자의적이고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과정이 덧붙여져 부풀려지고 확장되고 변형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끝도 없이 연이어지면서 무한순환 반복된다. 이야기의 본질은 말하자면 닫힌 것이 아니라 열린 것이며,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렇게 열린 이야기며 비결정적인 이야기에 대한 형식실험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사립미술관 문화교육 프로그램에 연계해 열린 전시다. 그 과정을 보면 먼저 어린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심사과정을 거쳐 일정 그림을 선정한다. 그리고 선정된 그림을 유리조형작가들이 유리조형으로 옮기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그렇게 그림과 함께 유리조형작업을 전시한다. 세부적으론 유리 숲속 이야기란 공모주제로 제안된 것인데, 유리섬이라는 장소특정성을 염두에 둔 주제이지만, 사실상 자유주제로 봐도 되겠다. 그 과정에서 유리섬이라는 다소간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개념이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수는 있겠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리섬은 없는 장소며 부재하는 장소, 불가능한 장소다. 미셀 푸코 식으론 유토피아가 되겠다. 푸코에게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 등재된 장소를 의미하며, 분명 현실에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아니면 최소한 일반적인 장소개념과는 다른 의미기능을 수행하는 장소를 의미하는 헤테로토피아와 비교된다. 그러면서도 도서관과 박물관 같은 시간의 헤테로토피아, 휴양지와 같은 일탈의 헤테로토피아와 그 의미기능이 일정정도 부합되고 합치되는 면이 없지 않다. 결국 유리섬의 위상학적 장소개념은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 사이에, 일상과 이상 사이, 현실과 일탈 사이에 위치하고 등재된다고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선정된 이야기들을 보면, 괴물과 같은 상상 속의 동물, 공작새, 저승사자, 나무집 속에 살고 있는 다람쥐 형제, 꽃과 나비, 버젓이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웃고 있는 꽃, 토끼와 거북이, 사자의 먹이사냥 같은 테마들이다. 하나같이 비현실적 소재들이고, 일상적인 소재의 경우에도 일상 그대로는 아니다. 동화와 설화, 전설과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며, 일상적인 경우에도 비일상적인 경우로 각색되고 변형된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말하자면 이야기들의 이야기, 이야기들이 유래하는 원천으로서의 이야기,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부르고, 그렇게 무슨 천일야화에서처럼(아라비안나이트가 그 원전인 천일야화에서 이야기의 중단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삶에 대한 알레고리를 의미한다. 삶은 이야기하는 것이고, 죽음은 그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이야기, 원형적인 이야기에 해당한다. 이 이야기의 씨앗을 근거로 어린이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꽃을 피웠고, 그렇게 꽃 핀 이야기들을 유리조형작가들이 유리조형작업으로 옮겼다.
여기서 어린이들은 애초에 이야기를 원형 그대로 재현하지도 않고 재현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작가들 역시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 그대로를 재현하지는 않는다. 저마다의 상상력과 해석의 과정이 매개가 돼 제 3의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원형적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그러면서도 원형적 이야기와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렇게 지어내고 만들어진 이야기는 그저 재현의 소산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의미와 경우로서의 창작일 수 있다. 말하자면 어린이들도, 그리고 작가들도 원천으로서 주어진 원형적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각색하는 자기화의 과정을 매개로 한 능동적인 창작주체로서 참여하고 협업한 것이다.
이 협업의 과정은 담론과 관련해 꽤나 의미심장한, 그리고 흥미진진한 부분을 예시해준다. 말하자면 상호영향사(롤랑 바르트의 상호텍스트성 혹은 간텍스트)에 대해서 말해준다. 그 일차적 의미는 물론 주체(어린이)와 주체(유리조형작가) 간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그 자체 타자에 의해 형성되는 주체(주체는 타자에 의해, 타자와의 관계설정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다)라고 하는 타자론 혹은 주체론의 핵심개념과 맞물린다. 그리고 지평융합(가다머)이 작동한다. 어린이의 지평과 유리조형작가의 지평이, 원형적 이야기의 지평과 각색되고 변주된 이야기의 지평이 상호작용하면서 원래는 없던 제3의 이야기가 지어지고 만들어진다. 해석의 과정이 매개가 돼 원형적 이야기를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변형되는 이야기가 흡사 이야기 전달하기 놀이를 닮았다. 이야기 전달하기 놀이에서 이야기는 처음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가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이야기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가 그 원인이지만, 의외로 이야기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해석행위가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그렇게 협업은 단순한 재현과 재현의 관계가 아닌, 해석과 해석이 만나지는 능동적인 장이 되고 있으며,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장에 대한 형식실험을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정리를 하자면, 어린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바탕으로 유리조형작가들이 유리조형으로 옮긴다. 여기서 어린이들은 일종의 욕망 내지 무의식을 그린 것이며, 따라서 유리조형작가들은 그 욕망을 실현시켜주고 무의식이 드러나게 해준다. 말하자면 욕망과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의 자기실현을 돕는 것이다. 여기서 창작주체는 타자의 자기실현을 돕는 조력자(일종의 욕망의 조력자)일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보면 이 개념(욕망의 조력자로서의 창작주체)은 현대미술에서 그렇게 낮선 개념은 아니다. 이를테면 저마다 꿈꾸는 집을 이미지로 실현시켜준다거나(소망프로젝트), 현실원칙에 부닥쳐 접어야 했던 욕망을 가상현실을 통해 실현시켜준다거나(욕망프로젝트), 희미해진 기억을 복원시켜주는 프로젝트(기억재생프로젝트)가 그렇다.
보통 상호작용미술이라고 한다면 관객의 기술적인 참여에 의해 작동되는 미디어아트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고 마음과 마음이 동해지는 아날로그 형 상호작용미술이랄 수 있겠고, 크게는 커뮤니티아트의 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미디어로 치자면 상호소통과 관계형성을 매개시켜주는 따뜻한 미디어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 통해 원형적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 이야기를 파생하는지,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 이야기로 확대 재생산되는지를 예시해준다. 다시금, 전시주제인 속속 이야기는 그림 속 이야기와 유리조형 속 이야기의 상호작용을 의미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이어지는 이야기들의 무한연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 자체 삶의 알레고리를 의미한다.

2015년 11월